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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도 사토리의 안녕
텐도 사토리의 생과 죽음에 관하여
날카롭게 별러진 칼이 몇 번 어설프게 맨 살을 가른다. 그리고 한 번, 결심한 듯 아주 깊이 허벅지 안쪽 살을 잘라냈다. 피는 아름답게만 새지 않아서, 위로도 옆으로도 막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정도로 미지근하게 맞춰둔 물이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러고도 피는 멈추지 않고 벌어진 살 틈으로 흐른다. 울컥, 덩어리 진 검붉은 피.
만약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텐도 사토리는 우웩, 알기 쉽게 싫은 티를 내며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현실이다. 허벅지가 불에 지져진 듯 뜨거운 것 역시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상황에 현실성을 더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피가 잘 흐르도록 먹은 아스피린 한 통이 통증을 덜어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주 오래 이 순간을 준비해왔기 때문일까, 텐도는 스스로도 알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본 죽음들은 하나같이 황홀했다. 그 중에서도 어린 텐도의 뇌리에 가장 깊게 남은 죽음은 단연 아름다운 여배우의 자살장면이었다. 물론 그 모든 장면은 제작진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 연출된 것이었고, 창백한 피부의 가련한 작은 몸을 남자주인공이 안아 올리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끝이 났지만, 어쩐지 텐도의 기억 속에 그 가상의 죽음은 현실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차갑게 식은 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남자주인공의 애정은 마지막 휴식을 방해하려는 헛된 몸짓처럼 보였을 뿐이다. 여자주인공이 단호한 손짓으로 손목을 그어 내리는 장면을 텐도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보았다. 내가 오롯한 나와 만나는 시간, 그리고 이 세상에 내가 있었던 흔적마저 지워내려는 몸짓, 언젠가 내가 죽는다면, 그래 나는 저렇게 죽을 것이다. 아주 좁은 욕조에서, 천천히 내 안에 든 피를 녹이며.
정말 욕조에서 자살을 하려면 손목을 긋는 정도를 가지곤 어림도 없고, 죽고 난 후에도 퉁퉁 불어 끔찍한 몰골이 된다. 몇 번의 조사 끝에 찾은 정보들은 텐도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자잘한 사실들이야 어쩌려나 싶고, 죽은 뒤의 모습이야 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 시체를 찾을 즈음에 자신은 이미 먼 곳으로 떠난 뒤일 테니까. 어디로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지금 있는 이 장소를 떠나야 한다는 것, 맞지 않는 신발에 억지로 발을 구겨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방법을 결정하기에 앞서, 텐도는 죽음을 결심했었다.
***
아주 어릴 때부터 텐도 사토리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질감을 느꼈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 많은 별들 중 이 행성에서, 그리고 이 나라의 이 지역에서, 텐도 가문의 차남이 되어 태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무수한 확률을 뚫고 이 생을 얻었다면 분명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만약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한다면? 잘못 태어난 거지.
20살이 되기 전까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자신의 의지로 이곳을 떠나자. 텐도는 그렇게 결심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아주 고리타분하지만, 그것 역시 가정교육의 탓이 아니었나 짐작해보게 된다. 네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텐도 가문의 율법이기도 했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나누는데 아주 무디거나, 아주 예민해지거나. 글자를 뗀 직후부터 장난감에 이름을 쓰는 법을 배워야 했던 텐도 집안의 아이들은 단연 후자였다. 때로 형의 인형이나 동생의 블록을 흘금거리면 호되게 혼이 나곤 했다. 네 것이 아닌걸 가지려고 하면 안 되지. 부모 나름대로는 아이들의 투닥거림을 미리 방지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 가르침은 텐도 사토리의 안에서 몇 번이고 재생산됐다. 그리하여 텐도는 그에게 주어진 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기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자신은 생을 살기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다. 마치 물고기가 억지로 땅 위를 걸으려는 것처럼, 새가 수면 아래로 깊이 잠기려 드는 것처럼, 본성에 어긋나는 짓을 하려는 듯 여겨졌다. 누군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느냐 묻는다면, 사는 게 즐겁지 않기 때문에, 라고 답했을 것이다.
텐도 사토리에게도 물론 즐거운 순간은 있었다. 배구를 시작하고서부터는, 하루 종일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마저도, 마치 빌린 장난감을 함부로 가지고 논 뒤 찾아오는 죄책감이 후에 밀려왔다
나는 내가 즐거운 배구를 하고 싶어요.
이번 플레이는 반드시 칭찬받겠지, 생각한 순간, 고문선생님의 질책이 날아온다. 배구는 개인플레이가 아니야, 네 생각대로만 움직이지마, 으쓱했던 초등학생의 어깨가 곧 위축되고 말았다. 하루는 한 학년 위의 선수를 몇 번이나 똑같은 코스로 막아서, 결국은 눈물을 흘리며 체육관을 뛰쳐나가게 만든 적 있었다. 저 정말로 대단하죠. 뿌듯한 얼굴로 돌아본 곳에 정말 질린다는 표정을 한 어른들이 있었다. 같은 코트 위에 있는 친구들 -텐도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광의적인 의미로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역시 괴물을 보듯 자신을 바라봤다.
즐거움은 순간이고 그 이후는 심연에 잠긴 것처럼 괴롭기만 하다. 하루하루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블로킹은 혼자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특히 상대를 예측하고 뛰는 텐도의 블로킹이라면. 이 사실이 어쩌면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텐도는 생각했다.
절실히 노력했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걸 포기하고, 남들에게 맞춰 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나 그랬다고 해도 진정으로 즐거웠을 리 없다. 내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졌을 리도 만무하다. 어차피 자신에겐 정해둔 선이 있었다. 나의 생을 찾고 있는데, 굳이 내가 아니게 되면서까지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괴물이라 부른다면 기꺼이 괴물이 되어주리라, 텐도는 그렇게 다짐했다.
***
누군가 갈고리를 뒷목에 걸어서 그대로 영혼을 뽑아내는 것 같았다. 몸은 분명 물 아래에 있는데 정신만은 허공을 부유한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텐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제 몸을 봤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 힘에 버겁다. 간신히 떨리는 눈꺼풀을 치켜 올렸다. 피가 퍼지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손에 쥔 칼을 들어, 이번엔 반대편 허벅지를 그어 내렸다. 힘이 빠진 탓에 전만큼 깊은 상처를 내긴 어려웠으나 후회할 여력을 남기지 않기는 충분했다.
후회, 생이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텐도는 어느 것 하나 후회해 본 적 없다.
어지러운 머리는 몇 년 전 있었던 일을 마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양 보여준다.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와시죠 탄지 감독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번갈아 누르며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자신의 얼굴도. 그때 만약 자신이 일생을 바꿔줄 경험을 앞두고 있단 걸 알았다면 저것 보다는 좀 더 나은 태도를 보여줬을 텐데, 텐도는 지금에 와 생각했다.
나는 내가 기분 좋은 배구를 하고 싶어요.
상관없어, 점수만 얻을 수 있다면.
생소한 답변 앞에서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한 번도 허락 받아 본 일이 없다. 네 마음대로 해, 이 간단한 말을 텐도는 16살때에야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그 말이 한 사람을 그토록 고무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하고 싶은 바대로 한다. 나의 존재가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을 처음으로 찾은 것 같았다.
별나다는 말은 타인이 정의해주는 것이지만 오래 그 말을 듣다 보면 정말 스스로도 자신을 별나게 여기게 된다. 시라토리자와에서 텐도가 편안함을 찾았던 건 그의 친구들-이번에는 진정한 의미의-이 텐도 못지 않게 별났기 때문인지 몰랐다. 첫 만남에서 텐도는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오히라 레온을, 야마가타 하야토와 세미 에이타, 그리고 그 외 모든 시라토리자와의 선수들을 별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텐도를 남과 다르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텐도도 그들을 별나게 여기기를 관뒀다. 또 스스로 역시도.
뜨거운 뙤약볕도 야외 체력훈련을 막을 수 없었다. 유난히도 더웠던 1학년 여름방학, 모두는 알맞게 익을 때까지 운동장을 돌아야 했다. 심장이 터져버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늘로 숨어들어 아무렇게나 누워버렸다. 거친 호흡소리만 여기저기 차고 넘쳤다. 체력에 관해서라면 특히 더 할 말이 없는 텐도인지라, 거의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퍼져버렸다. 뺨에 물기 젖은 시원한 표면이 닿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눈도 뜨지 않고 기절해버렸을지도 몰랐다.
“뭐야?”
피곤함에 반사적으로 짜증스러운 반응이 나왔다. 세미가 제 뺨에 아이스초코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먹을래?”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아이스초코를 넘겨받아 빨대를 꽂았다. 가끔 텐도는 아이스초코야 말로 자신이 이곳에 태어난 이유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있었다.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때로는 아주 진지했다.
“어떻게 알았어?”
납작하게 엎드려서 아이스초코를 빨아먹기 위해 고개만 위로 빼죽 올려 들었다. 부드럽고 차갑고 달콤한, 이 음료는 언제나 텐도에게 위안을 주었다. 어떻게 알았지, 지금 딱 이 회사에서 나온 이 아이스초코가 마시고 싶었다고.
“너 맨날 그것만 먹잖아.”
그렇게 말하며 세미는 텐도의 옆에 주저 앉았다. 손에는 자신의 몫인 비타민음료가 들려있다. 그 정도는 알아야지. 팀메이트인데.
팀메이트, 텐도의 귀가 쫑긋 섰다. 그러고보니 어디에서도 그런 인정을 받아본 적 없었다. 우리라거나, 동료애라거나, 그런 건 좋아하는 배구를 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싼 대가일 뿐이라고만 여겼었다.
“그런가, 나 여태껏 친구가 없어서.”
말하고서 잠시 후회했다. 그런 이야기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뒤늦게 일었다. 텐도에게 다가왔다가, 텐도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그 이유만으로도 떠나간 아이들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길까, 그런데 봤자 별 수 없지. 쭈욱, 아이스초코 곽이 파이도록 깊게 들이마셨다.
“그랬어?”
그리고 세미 역시 바닥이 보이도록 비타민 음료를 한 번에 들이킨다. 그것이 그날 했던 대화의 끝이었다. 그 다음에도 종종 체력이 바닥난 텐도를 위해 팀메이트들이 번갈아 아이스초코를 전달해줬다. 전쟁터에서 식량 보급받는 기분이야. 텐도의 생경한 비유에도 오히라는 그래, 그렇구나 웃어주었다.
***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느껴졌다. 피 냄새 때문도, 뒤늦게 엄습한 고통 때문도 아니었다. 구토를 하기 위해 욕조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으나, 벌어진 입 사이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이틀,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일까. 투명한 타액만 길게 늘어졌다. 타일바닥을 깨부술 듯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서야 텐도는 자신이 아직 손에 칼을 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칼이 떨어졌을 법한 자리를 보는 데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에, 시야가 점차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선명한 빛이 눈 앞에 성큼 다가온다. 죽음의 직전, 사람들은 터널에서 갓 빠져 나온 것 같은 빛무리를 봤다고 증언했다. 임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텐도는 꼼꼼히 읽었다. 그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3학년 마지막 경기, 아주 느리게 떨어졌다고 생각한 공이 어느새 시라토리자와의 코트를 때렸을 때, 텐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우습게도 그 안에는 일말의 해방감 역시 존재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울고 싶지 않았던 것도, 화가 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짐작하고 있던 끝을 맞이하는 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놀이를 끝내는 일과 다른 문제다. 물론 그 끝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은 일렀다. 이렇게 끝 나리라곤 생각 안 해봤는데, 그렇죠? 모두가 슬픔과 고통을 만끽하고 있을 때, 텐도는 웃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순간의 즐거움은 지속될 수 없다는 건 경험을 통해 알았다. 그 순간이 아무리 길게 이어져, 3년이라는 햇수로 늘어난대도 그것 역시 찰나에 불과하다. 그 뒤는 또 지리하고 지루한 시간이 이어진다. 다시 돌아갈 심연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단지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아니야, 솔직히 말해야지. 인정해야 했다. 조금은 두려웠다는 걸. 끝나길 바라지 않는 순간이 끝나는 것이, 인생의 달콤한 부분들은 이미 전부 취해버렸고 남은 건 씁쓸하고 긴 외로움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 3년 동안, 텐도는 가끔 자신이 삶의 이유를 찾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끝나버리게 된다. 삶은 이어지는 데 이유는 단절된다면 그것은 생의 이유라고 할 수 없다.
낙원은 추방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텐도가 낙원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건, 마치 삶이 그랬듯 그곳 역시 제게 주어진 자리가 아니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행복들과, 조각난 삶의 이유들과, 그 순간순간마다 함께 했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내 생에 아무 이유도 없지는 않았네'
목적을 찾지 못하면 이 생을 떠나야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조각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금 더 편하게 떠날 수 있다. 이제 어디로 가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아무데도 아닌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환희와 기쁨, 그리고 전에 겪어보지 못한 설렘이 텐도의 전신을 감쌌다. 물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고, 용해되지 못한 혈액은 덩어리져 수면에 떠 있다. 어느 것 하나 꿈꿔왔던 마지막 모습과 같지 않은데, 그 점이 오히려 즐겁게 느껴졌다. 산다는 건 한 번의 시도에 불과하고,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엔딩이다. 텐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5,030자) 샘플용으로 공개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u_u)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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